변증법적 접근

 

변증법은 많은 사회학적 사상에서 지배적인 인과 논리와 대조적이다. 변증법은 사회세계에 단순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실과 가치간의, 사회세계의 현상들간의 명백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한다. 현재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인 불가피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외

 

초기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인간본질의 왜곡을 '소외'라고 불렀다. 

 

노동자는 생산활동, 생산물, 동료 노동자로 부터 소외된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생산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지 않으며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 자본가는 이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지불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생산활동을 자본가에 예속된 행위로 생각하게 된다. 생산활동이 노동자의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며 자본가에게 결정할 권한을 위임하므로, 노동자들은 생산 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둘째, 노동자들은 생산활동의 산물인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는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생산물을 통제할 수 없다. 노동자는 자동차 조립과 같은 산업 현장에서 고도로 분업화된 업무를 수행하여, 생산물의 어떤 부분에 기여하는지 알길이 없을 때도 있다. 이러한 기여의 감각에 대한 상실은 노동자의 존재를 위축시킨다. 노동자는 생산물의 최종 생산은 인간이 아닌 공장시스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번째,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로부터 소외된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타인과의 협력을 요구받고 또 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자연적 협동은 붕괴되며 사람들은 종종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은 설사 절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산업 현장의 본질적 원리에 의해 서로 소외된다. 최대생산성을 요구하는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들 간에 극심한 경쟁과 갈등이 유발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는 인간 잠재력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은 기계와 같은 역할을 요구받으며 인간적인 존재로부터 멀어져 비인간적인 일을 수행한다. 인간 관계는 점차 단절되며 의식 또한 마비되어 파괴된다.

 

소외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자연적이고 총체적인 상호연결에 대한 구조적인 강제된 파괴이다.

 

 

물화, 상품의 물신화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자연과의 관계, 다른 행위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생존에 필요한 객체를 생산해낸다고 보았다. 객체를 생산하는 것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이다. 이들 객체는 자연과 환경으로부터 누군가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사용가치이다. 객체는 인간노동의 산물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객체는 상품이 되고 상품은 교환가치를 갖는다. 교환가치를 획득한 상품은 인간과 객체의 관계를 전복한다. 사람들은 상품과 상품의 시장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며 현상으로 나타나고 궁극적으로 현실이 된다. 상품은 독립적이며 거의 신비스러운 외부적 현실이 된다. 

 

루카치에 의하면 물화는 물체화의 과정으로 인간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형식이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이라고 믿어지고 결과적으로 그 사회적 형식이 정말로 그런 특성들을 갖게 되는 과정. 사회구조가 자신들의 통제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고 변화할 수 없다고 믿는 것.

 

사람들은 상품과 상품 시장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는 후에 루카치물상화라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확장된다. 사람들은 상품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다른 구조적 요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한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물상화된 구조로 자본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사유재산, 노동분업, 사회계급 등의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상화 된다.

 

 

 

계급의식과 허위의식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모두 허위의식을 가진다. 부르주아지는 자기 계급의 역사와 자본주의의 형성에서 수행됐던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내에 존재하는 모순 뿐 아니라 그러한 모순이 싹트는 데 기여하였던 그들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결코 그 허위의식을 진정한 계급의식으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즉자적 계급을 탈피해서 대자적 계급이 되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에서 역사적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본에 대항하는 것을 넘어 대자적 계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계급의식과 허위의식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와 발전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다소 역동적인 사고체계였다. 허위의식은 자본주의 시기에 걸친 상황을 묘사하는 반면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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